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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문명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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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년전 빙하기(간빙기, 홍적세)시 한반도 주변 상황
빙하기(간빙기, 홍적세)시 한반도 주변 상황
위의 자료는 영국의 새턴대학에서 작성한 자료임.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한반도 황해는 초원지대고 아래 그림의 좌측하단 그림과 같이 큰강이 흘렀다.
또한 위측 그림 중앙부분의 하늘색 부분은 빙하(얼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구석기 시대 한반도 중심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조선의 건국지라고 보여지는 만주쪽은 당시 사막지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빙하기에 기초한 문명의 전파
기원전 15,000년경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빙하 및 대륙의 사진자료이다.
그러므로 한반도 주변 문명의 발생은 마고문화로 알려 진 난생설화 중심의 모계사회가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황해대평원이라고 부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산재하여 살았을 것이고(그렇다고 현재처럼 인구가 수억명은 아니고 잘 해야 수만~수십만 정도로 생각된다.
천부도지 내용을 참조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처음부터 번성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고...
여기에 대빙하기(공룡멸족기)까지 수십억년전에 발생한 지각 대변동이 없었으므로 한반도 남부에 공룡의 최종 생존자들이 몰려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대빙하기 이후 인류의 출현이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에 해당하는 구석기시대 인물들의 간빙기, 또는 대빙하기를 견디는 방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원전 8,000년경 간빙기가 끝나면서 평균수심 100m이하인 황해대평원은 위의 그림처럼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천부도지에 전해지는 바와 같이 마고가 물로 청소를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역수가 생겨서 물의 홍수가 크게 일어났다고 기록되는데 이러한 기록은 인류의 다양한 곳에서 전해진다.
그런데 사람은 문명이 진화하여 회귀본능을 대부분 상실했지만 풍천장어를 비롯한 연어등의 회귀본능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기가막힌 것은 이 풍천장어가 한반도 및 중국대륙으로 두번째 그림의 물길을 따라 아직도 회귀하고 있으며,
산란은 필리핀만의 해저 깊은 곳에서 한다고 알려졌다.(유일하게 양식이 안되는 어종임)
기원전 18,000~12,000 황해대평원을 거점으로 한 인류는 생각보다 앞선 문명과 생활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지구의 다른편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을때 이들은 농경, 수렵, 어업등 2-3모작이 가능한 자연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들은 인류의 지혜의 발달 수준을 단순한 진화론의 관점에서만 추론하고 있다.
아무튼 앞선 부족의 일단들이 성장하며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나서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하여 이들은 이동을 시작했다.
기원전 10,000년을 전후하여...만주, 슈메르, 지중해, 아메리카...등으로 이동...
또한 이들은 이미 거석문화라는 인류의 잔존문화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증거로 된다.
도처에 이에 대한 흔적을 남기며 머나면 개척의 세월을 갖게된 것이다.
한반도에 상륙한 인류는 한반도를 따라 점차 북상하였고, 간빙기 중간에 낀 얼음이 녹는 과정에서 바이칼의 천손문화를 가진 몽골리안과 만주일대에서 조우하여 문화의 중첩이 이루어진다.
즉 부계사회와 모계사회의 만남으로 한반도인들은 청동기 문화를 탄생시키며 한강을 중심으로하는 마한문화와 홍산을 중심으로하는 진한 문화 산둥반도를 중심으로하는 번한 문화( BC6.000년경)을 잉태한다.
이들의 삼한의 삶의 역사와 문화적인 특징을 가장 우수한 천문역학적으로 기록한 것이 징심록이고 신화적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환단고기이다.
거석문화의 변화를 보면 초기 남방식 고인돌문화가 북상하다, 북방식 고인돌로 변화하여 남,북진하고,
다시 고인돌을 중심으로 인류최초의 벼농사를 시작하여 농경문화를 창조한 마한인들은 적석총문화(성황당 돌무지)를 발전시켜,
한강부근에 적석총 문화(오리엔트성좌 구도, 이는 모계사회의 출신 별자리라고 말한다, 석촌동에 있다.)를 완성하고 북상하여 압록강변에 대규모 적석총문화를 형성하고, 다시 북상하여 바이칼 부계(천손사상)와 만나면서 홍산의 피라미드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슈메르의 지구랏, 아메리카대륙의 피라미드, 잉카와 마야의 피라미드...
초고대의 피라미드는 그당시에 공유된 인류의 지혜 수준이 어떠한 수준인지를 증거하는 물적 자료가된다.
초고대시절에도 지구촌의 모든 인류는 지혜를 공유하고 문화적 소통이 가능했다는 점을 알리고 있다.
기원전 수만년전부터 기원전 1천년전까지의 이룩된 초고대사회의 피라미드는 천문학의 수준이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당시의 천문학의 발달은 농경사회의 발달을 촉진하고 빛에 대한 숭배사상과 철학이 심화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천년전부터 고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양육강식의 육식문화가 유행병처럼 번지면서 약탈경제 약탈문화로 변질이 되고 양자역학의 천문학은 미신적인 점성술로 황폐화 되기 시작하였다.
환조선 문명의 유물 (환역과 금척)
1. 쌀과 콩 농사 세계 최초 - 1만 5천년이상전 (충북 청원군 출토)
2. 배만들기(조선) 세계 최초 - 8천년이상전 (경남 창녕군 부곡면 출토)
3. 고래잡이 세계 최초 - 8천년이상전 (경남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4. 신석기 세계 최초 - 2만년이상전 (전남 장흥군 출토)
5. 토기 세계 최초 - 1만수천년이상전 (제주도 고산리 무문무늬토기 출토)
빗살무늬토기 세계 최초 - 8천년이상전 (강원도 양양군 출토)
6. 고인돌 세계 최초 - 8천년이상전 (전남 화순군)
7. 돌에 세겨 놓은 닮은비 상수(하진리 눈끔자 돌멩이)
8.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간략한 경전... 천부경
9. 환역의 기하학과 모형 : 윷과 투전, 바둑, 장기, 화투 , 주령구
10. 삼황내문경( 삼일신고,티마이오스)
11. 칠정운천도(주비산경) : 칠정산 내외편
12. 가장 완벽한 수 글자(58자, 가림다 글자) - 훈민정음
13. 가장 과학적인 우주모형인 곡옥(토러스)과 삼족오문양( 13의 우주혼)
14. 가장 과학적인 천문역학 모형 - 마니산 천제단 : 고구려의 장군총과 천마총등 종교적 제사유물들
15. 청동경( 다뉴세문경)과 청동검등의 제품들( 방울, 종, 화폐, 저울)
16.우주영혼과 인간혼을 불러내는 악기 - 굴포리의 13구의 피리와 신라 거문고와 옥적(만파식적)
17. 박혁거세의 금척: 금척지 유물과 유적 , 징심록 ( 천부도지) , 첨성대, 이성계의 몽금척 그림 무용 등
18. 삼국의 곡옥과 포석정 (나선띠) 과 주령구(周靈柩)
19 천상열차 분야지도( 천상도 )
20. 세종문종의 금척 : 훈민정음과 칠정산 내외편외에 측우기등 다양한 문화유물
21. 황금비우주 모형 : 태극기 (환구단과 금척 대훈장)
1. 인류 최초의 쌀과 콩 생산지
인류 최초의 쌀과 콩 생산지
벼는 6천500년 전에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배했다.
4천~5천년 전 인도 갠지스(Ganges) 강 유역, 북부 미얀마, 타이, 라오스 혹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에는 이후에 쿠릴해류( Kurile Current, 親潮海流)를 타고 이주해온 동남아인에 의해서 전파된 것으로 그동안 여겨왔다.
동남아인이주설(東南亞人移住說)에 따르면, 밭벼농사(dry-land cultivation)는 우리나라에서 BC 3천500년경, 일본은 BC 1천200년경에 전해졌다.중국에서 벼 재배는 BC 5세기 혹은 BC 11세기 전후, 중국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남부확산경로(southern diffusion route)학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부인되었다. 대략 9천년 전 중국과 인도 야생 벼의 근접관계성이 컴퓨터 알고리즘 분자시계(molecular clock)기법으로 밝혀졌다.우리나라는 1990년 7월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의 탄화미(炭化米)가 BC 2천100년경으로 추정됐다.
1987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가와리) 신석기 토층에서 나온 12톨의 볍씨를 미국 베타연구소에서 방사성탄소연도측정(radiocarbon dating) 한 결과 5천년 전으로으로 나와 BC 2천300년경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1994년 충북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으로 1만3천~1만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볍씨 11톨이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2016년 국제고고학회에서 벼농사의 기원을 한국으로 규정했으며, 1만3천년 전까지 소급해 세계적 고고학교과서로 사용하는 ‘고고학 개론서(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도 한반도 기원을 못 박고 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의 긍지를 살려서 지난 1972년부터 한국은행 50원짜리 동전에 벼이삭을 도안해 논벼농사의 기원지(Origin of rice farming)가 한국임을 기념했다.동양의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사상에서 벼농사는 거대한 변혁을 초래했다.
경제사회적 의미에서는 i) 먹거리 생산성의 제고, ii) 출산비율 폭증, iii) 고대국가 건설의 기반과 재정확충, iv) 의식주의 동반성장을 촉진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벼가 평균 1천8배 가량의 산출을 얻는다고 믿었기에 벼화(禾)를 1,008(千八)을 의미하는 벼화(禾)로 창작했다.
볍씨를 뿌려서 벼를 추수하고 찧어 쌀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손이 88번 가량 간다는 의미에서 88(八十八)로 쌀미(米)자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벼농사는 일반적으로 88배 정도 소출을 본다고 믿었기에, 오늘날 승수효과로 표시하면 생산창출효과를 (88)n으로 추산할 정도로 먹거리생산에 변혁을 초래했다.식물의 생산을 통해서 경제적 소출을 계산했던 생각은 BC 600년경 관중(管仲)의 ‘관자(管子)’라는 책에서 시작했으며 특히 경제전쟁론과 화폐계량설의 원조가 되었다.
‘한해 농사는 곡식경작이 최고, 10년 농사는 수목재배, 100년 농사는 인간교육이다(一年之計莫, 如樹穀. 十年之計,莫如樹木. 終身之計,莫如樹人)’라는 표현에서 오늘날 계량경제학이 잉태되었다.
이 구절을 케인즈의 승수이론으로 풀이하면 곡식경작은 한해 1,008배, 수목재배(木=十八)는 (18)10 까지, 인간교육(人=八=∞)이 국가를 번창시키는 건 (∞)100까지도 가능하다고 봤다.
세계 최고(最古)의 벼농사 유물 볍씨
1994~2001년 기간 중에 우리나라 충북 청원군 소로리 일대에서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 구석기 유물들이 매우 넓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습되면서 볍씨가 출토되었다.
흙속에 묻혀있는 볍씨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흙을 채로 쳐서 걸러지는 알갱이들을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조사해서 볍씨를 찾아내야 하는 일이다.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들을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 연구실에서 교차 측정한 결과,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절대 연대값을 얻게 되어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임이 판명되었다.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굴된 법씨의 모습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인류의 약 60%가 쌀을 주식으로 먹고있는데, '벼'의 경작은 인류에게 있어서 '불'의 발견에 버금하는 기술혁신으로 인식하게 됨에 따라, 전세계 저명한 학자들은 인류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벼' 경작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해 오고 있었다.
그간 1970~80년대까지는 주로 황하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발굴된 볍씨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장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양자강 유역인 호남성 도현 옥섬암(玉蟾岩)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가 1만 1,000년 전으로 밝혀지면서 이 주장이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충북 청원군 '소로리 볍씨'가 출토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공인되게 되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와 양자강 유역인 호남성 도현 옥섬암 동굴유적, 강서성 선인동(仙人洞) 동굴유적, 하남성 하모도 유적 등 세계에서 오래된 볍씨들이 출토된 지역의 위치는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볍씨는 1994년 지표조사, 1996~1997년 시굴조사, 1997~1998년 1차 발굴조사, 2001년 2차 발굴조사, 2012년 시추조사를 통해 토탄층에서 볍씨 127톨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검증한 결과, 1만 5천 년 전 볍씨로 측정되었다.
이제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강서성 선인동(仙人洞)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의 10,500년, 또는 호남성 도현 옥섬암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볍씨의 11,000년보다 대략 3,000년을 더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임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고의 볍씨는 손보기·이융조 교수 등이 1991년에 일산 한강하류 부근에서 발굴한 12톨의 가와지볍씨로서 약 5,020년 전의 볍씨였다.
경기도 고양시는 2014년 3월에 '고양 가와지볍씨박물관'을 개관했는데, 국내 최초의 쌀 관련 볍씨유물 문화박물관이다.
또 지난 2016년 청주시 소로리에 세계 최고의 소로리 볍씨 출토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그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들이 출토된 유적들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호남성(후난성) 영주시 도현 옥섬암(玉蟾岩) 유적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이전,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옥섬암(玉蟾岩) 유적은 BP 10,000년의 동굴유적인데, 4립의 볍씨가 출토되었다.
감정결과 야생도의 특징이 남아있고 산류(인디카)와 갱류(자포니카)의 분화가 완성되지 않은 초기 재배도임이 확인되었다.
2. 강서성 만년(萬年)현 선인동(仙人洞) 유적
선인동 유적은 강서성 만년(萬年)현에서 동북으로 15km 떨어진 작은 산의 석회 용암 동굴유적인데, 196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유적은 상하 2개의 문화층으로 나뉘는데, 불에 탄 소토(燒土), 구덩이, 다량의 동물뼈, 인골, 석기, 골각기, 조개껍질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 선인동 주민의 음식에는 이미 벼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절강성 여도(余姚)시 하모도(河姆渡) 유적하모도(河姆渡, 7,000~5,000년 경 추정) 유적은 1973년에 장강 하류지역인 절강성 여도(余姚)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도작(稻作) 농경유적이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하모도 제4문화층에서 큰 범위로 발견된 벼의 흔적이다. 도곡. 벼껍질, 경옆이 혼합된 상태로 두꺼운 문화층을 형성한다. 이처럼 벼의 양이 많고 보존이 양호한 유적은 중국 신석기시대 고고학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당시 도작(稻作) 농경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려준다. 벼는 재배도의 늦은 유형으로 확인되었다.
콩의 한반도 기원설
한반도와 만주 남부는 국토의 75% 이상이 산악지대로 초원(草原)이 귀해 목축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냥을 하거나 적은 수의 가축들로 육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육류섭취가 매우 어려웠어지요
이러한 육류섭취를 대체해준 작물이 바로 콩(豆)이었어요
그런데 콩의 원산지가 우리 한반도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콩은 우리 한민족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궁합 작물로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부족했던
단백질과 지방을 책임져 왔어요
단백질과 지방은 인체를 구성하는 핵심 성분 이지요
콩은 구성성분이 40% 내외의 단백질과 30% 내외의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하는 중요한 공급원이었어요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50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목축이 발달하지 못했음에도
콩 덕분에 단백질과 지방 결핍에 시달리지 않고 잘 살수 있었지요
우리 민족이 유목민족이 되지 않고 기마민족으로 한반도를 지킬수 있었던 힘이
바로 콩 덕분이라 하지요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콩의 원산지를 만주 남부와 한반도로 보고 있으며
약 5000년전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한반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밭농사가 지어졌는데 북한의 회령,오동 고조선 유적지에서
기원전 1300년경의 청동기 유물과 함께 콩, 팥, 기장이 출토(出土)되었어요
이런 물증으로 보아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라는 것을 확인할수 있지요
실제로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임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조사도 있었어요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식량종자 확보를 위해 세계 각지의 야생작물 채취에 나섰지요
그들은 한반도에서 3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전세계 야생 콩 종자의 절반이 넘는
무려 3,379종의 야생 콩을 채취해 가지고 갔어요
식물의 원산지를 추정할때 변이종의 다양성이 그 기준이라 하는데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콩의 변이종이 발견된 것이지요
이렇듯 다양한 야생콩이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므로 해서 한반도가
콩의 원산지임을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이라 말할수 있어요
콩을 뜻하는 한자 두(豆)는 원래 고기를 담던 그릇을 말하고 있지요
일부에서는 콩깍지가 이 그릇을 닮아 콩 두(豆)자로 썼다는 말도 있지만
두(豆)는 원래 긴 밑받침이 있는 그릇으로 제사상에 제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요
따라서 두(豆)는 고기(단백질)와 연관이 있는 글자로 볼수 있지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콩 두(豆)자가 콩의 뜻으로 쓰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요
이 콩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중요한 곡식이었어요
콩의 종류는 무척 많지만 가장 흔한 콩이 대두(大豆)이며 모든 콩의 주종을 이루지요
대두의 상대적인 개념은 소두(小豆)라 하는데 소두는 팥을 이르는 말이지요
보리가 대맥(大麥), 밀이 소맥(小麥)인것처럼 종류가 비슷할때 덜 중요한것에 '소(小)' 자를 붙였어요
그러므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콩보다는 팥이 덜 소중했지요
하지만 늘 팥은 콩과 함께 짝을 이루었어요
'콩쥐팥쥐' 같은 말을 보면 콩도 팥도 우리와는 오래전부터 친숙한 식물이었지요
우리는 부여나 고구려가 콩의 원산지였기에 중국의 중원보다 훨씬 일찍 콩과 친숙할수 있었어요
백제나 신라도 고구려로부터 콩을 받아 들였지요
그렇기에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다양한 콩 조리법이 발달할수 있었어요
중국도 춘추전국시대에 콩을 만주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였고
콩의 재배가 일반화된 것은 진한시대 부터라 하지요
일본은 약 2000년 전에 한반도를 통해 콩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삼국시대때 일본과 한반도의 긴밀한 접촉으로 보아 그때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부터 일본도 콩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콩 쓰임새를 보면 콩을 정말 오래전부터 먹어왔음을 알수 있지요
그런데 이 콩이 밥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주곡(主穀)과는 사뭇 달랐지요
물론 밥에 콩을 직접 넣어 주곡으로 먹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 재료일 뿐이었어요
콩은 주식이기 보다는 메주를 만들어 된장과 간장을 뽑아 먹고, 갈아서 두부를 만들어 먹고
콩나물과 숙주나물로 키워 나물로 먹는 '반찬'의 역할을 많이 했지요
간장에 졸여 만든 콩자반을 반찬 삼고, 볶아서 간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콩소, 팥소, 녹두소, 콩가루는 떡의 맛을 내는 보조 재료 였어요
또 콩을 볶아 압착해서 짜낸 콩기름은 참깨에서 나온 참기름과 함께 부엌에서 쓰던 기름의 주종이었지요
이렇게 보면 콩은 오히려 곡식이 아니라 반찬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음을 알수 있어요
쌀, 보리, 기장, 조처럼 주곡으로 먹기보다는 밥과 함께 먹는 반찬의 재료로 쓰일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요
물론 채소와 나물, 고기반찬도 추가되겠지만 기본적인 골격으로는 쌀, 보리, 조가 밥이 되었고
콩은 반찬에 불과 했어요
이는 영양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몰라요
농경 생활에서 고기나 생선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탄수화물 중심의 주곡에다
콩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므로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말할수 있지요
아무튼 ,콩의 재배는 다른 곡물(쌀, 기장, 조, 수수)보다 훨씬 늦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콩의 원산지에 관해서도 많은 설이 있었다,
일본의 후쿠다(福田, 1933) 박사는 야생콩의 분화가 많이 된 곳이 원산지라는 주장을 토대로 만주와 한반도를 원산지로 보았다.
미국의 하이모위츠(Hymowitz, 1970)는 중국 주나라의 시를 수록한 시경(詩經, 기원전 11-6세기)에 콩 숙(菽)자가 있다는 근거로 중국을 원산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권신한(1985)은 한국 재래종이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보고되어 있는 콩이 지니는 각종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 한국이 콩의 원산지라고 결론지었다.콩을 재배하고 이용한 확실한 증거는 신석기 중기 이전의 유적에서는 발견된 것이 없다.
중국에서는 용산문화기(기원전 3000-2000년)와 상(商)나라 시대까지의 유적에서 콩이 다수 발견되었으나, 최근 미국 오레곤주립대학의 이경아(2012) 교수는 한·중·일 삼국에서 신석기시대에 발굴된 949개의 탄화콩에 대한 크기를 측정하여 비교한 결과 한반도 초기 무문토기시대(기원전 1600-600년)의 탄화콩들이 길이(L)와 넓이(W)가 뛰어나게 큰 대두(大豆)임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양사오,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콩들은 대부분 야생콩이며 재배콩은 기원전 2000년경의 한반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해 진다.기원전 6세기에 쓰여진 일주서(逸周書)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콩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는 ‘산융(山戎)은 동북이이(東北異夷)다. 융숙(戎菽)이 나는데 큰콩(巨豆)이다’라고 쓰여있고, ‘서주(西周, 기원전 7세기)가 상(商)을 정벌하고 조공을 받는 과정에서 산융에서 보내온 콩, 융숙(戎菽)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주서의 내용과 비슷한 기록들이 사마천의 사기와 중국 고전 관자(管子)에도 나온다.
홍콩대학의 호핑티(何炳棣, 1975) 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재배 콩은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볼 때 퉁구스족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대한해협의 원시토기문화시대(기원전 8000-5000년)를 거치면서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어로 채집과 지역에서 자생하는 벼, 기장, 조를 비롯한 곡류채식문화를 점진적으로 발전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기마 유목민족이었던 북부지역의 퉁구스족이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 정착을 하면서 가축을 많이 기를 수 없게 되므로 고기를 대체할 안정적인 단백질 급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생하던 콩을 재배하여 물에 불린 후 토기에 담아 삶아 냄으로서 트립신인히비터와 같은 영양 저해인자를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따라서 동이(東夷) 예맥족(濊貊族)은 인류사상 최초로 콩을 음식으로 이용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콩나물의 기원
콩나물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바로 우리나라입니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의 전통 식재료로 다른 식재료보다 저렴하고 흔한 식재료 중 하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가 힘든 식재료라 합니다. 콩나물 대중적으로 먹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 가득 탄 버스를 보고 콩나물시루 같다고 합니다. 현재는 초등학교의 정원이 30명 내외이지만 90년대만 해도 한 반에 아이들이 많아 콩나물 교실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가정마다 콩나물을 직접 키우는 곳이 많아 어머니가 콩나물에 물을 주면 물이 주르륵 흐르는 소리와 콩나물 시루 안에서 서로 키재기를 하듯 빽빽하게 올라오는 콩나물의 모습들이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처럼 콩나물은 우리와 너무 익숙하고 친근한 합니다.
콩나물은 우리나라에서는 먼 옛날부터 사용되는 음식재료로 다양항 요리에 사용되는데 특히 숙취로 힘들 날 콩나물 국밥이나 콩나물 국으로 속을 풀어주는 음식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식재료입니다.
콩을 재배하기 시작한 기원전 2000년경의 동북아사람들은 물만 닿으면 싹이 자라나는 콩나물의 존재를 일찍 알게 되었을 개연성이 크다.
최초의 기록은 중국이지만 콩의 원산지는 동북아 지역의 옛 고구려 땅인 만주와 한반도가 원산지로 우리의 전통 작물이었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중국보다 일찍 한반도의 선조들이 콩나물을 먹어 왔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식용으로 쓰인 콩나물의 기록은 남송시대의(1127~1279년) 산 가청 공이라는 문헌에 최초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콩나물을 언제부터 어떻게 식품으로 먹게 되었는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콩나물은 고려 고종때〈향약구급방1236>에 대두황권大豆黃卷1) 1) 생콩으로 콩나물(길금싹)을 길러 햇볕에 말린 것 이 나오는데 약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원대(元代)에 나온 <거가필용(居家必用)>에 녹두나물이 두아채(豆芽菜)라고 소개되고 있는 것보다 빠른 시기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말로는 ‘콩을 싹을 내어 기른다’는 뜻으로 ‘콩기름’이란 호칭으로 불리어 왔다.
이는 지금도 사용되는 엿기름(보리싹 내어 말린 것)이란 단어에서 콩기름과의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다.
콩기름이란 호칭은 조선조 말엽 19세기 중반까지도 사용되었다.
장지현(1993)2)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두부 제조 이전에 콩나물 재배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어 콩나물의 재배가 삼국시대로 소급될 수 있다고 하였다.
동북아시아인의 주식인 쌀과 콩의 기원지가 한반도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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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6천500년 전에 많은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재배했다.
4천~5천년 전 인도 갠지스(Ganges) 강 유역, 북부 미얀마, 타이, 라오스 혹은 중국 남부지역에서 시작되었고, 한반도에는 이후에 쿠릴해류( Kurile Current, 親潮海流)를 타고 이주해온 동남아인에 의해서 전파된 것으로 그동안 여겨왔다.
동남아인이주설(東南亞人移住說)에 따르면, 밭벼농사(dry-land cultivation)는 우리나라에서 BC 3천500년경, 일본은 BC 1천200년경에 전해졌다.중국에서 벼 재배는 BC 5세기 혹은 BC 11세기 전후, 중국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남부확산경로(southern diffusion route)학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 부인되었다. 대략 9천년 전 중국과 인도 야생 벼의 근접관계성이 컴퓨터 알고리즘 분자시계(molecular clock)기법으로 밝혀졌다.우리나라는 1990년 7월 경기도 김포군 통진면의 탄화미(炭化米)가 BC 2천100년경으로 추정됐다. 1987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읍(가와리) 신석기 토층에서 나온 12톨의 볍씨를 미국 베타연구소에서 방사성탄소연도측정(radiocarbon dating) 한 결과 5천년 전으로으로 나와 BC 2천300년경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1994년 충북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 유적에서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으로 1만3천~1만6천년 전으로 추정되는 볍씨 11톨이 출토되었다. 이로 인해 2016년 국제고고학회에서 벼농사의 기원을 한국으로 규정했으며, 1만3천년 전까지 소급해 세계적 고고학교과서로 사용하는 ‘고고학 개론서(Archaeology: theories, methods and practice)’도 한반도 기원을 못 박고 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의 긍지를 살려서 지난 1972년부터 한국은행 50원짜리 동전에 벼이삭을 도안해 논벼농사의 기원지(Origin of rice farming)가 한국임을 기념했다.동양의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사상에서 벼농사는 거대한 변혁을 초래했다. 경제사회적 의미에서는 i) 먹거리 생산성의 제고, ii) 출산비율 폭증, iii) 고대국가 건설의 기반과 재정확충, iv) 의식주의 동반성장을 촉진했다. 왜냐하면 당시 사람들은 벼가 평균 1천8배 가량의 산출을 얻는다고 믿었기에 벼화(禾)를 1,008(千八)을 의미하는 벼화(禾)로 창작했다. 볍씨를 뿌려서 벼를 추수하고 찧어 쌀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손이 88번 가량 간다는 의미에서 88(八十八)로 쌀미(米)자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벼농사는 일반적으로 88배 정도 소출을 본다고 믿었기에, 오늘날 승수효과로 표시하면 생산창출효과를 (88)n으로 추산할 정도로 먹거리생산에 변혁을 초래했다.식물의 생산을 통해서 경제적 소출을 계산했던 생각은 BC 600년경 관중(管仲)의 ‘관자(管子)’라는 책에서 시작했으며 특히 경제전쟁론과 화폐계량설의 원조가 되었다. ‘한해 농사는 곡식경작이 최고, 10년 농사는 수목재배, 100년 농사는 인간교육이다(一年之計莫, 如樹穀. 十年之計,莫如樹木. 終身之計,莫如樹人)’라는 표현에서 오늘날 계량경제학이 잉태되었다. 이 구절을 케인즈의 승수이론으로 풀이하면 곡식경작은 한해 1,008배, 수목재배(木=十八)는 (18)10 까지, 인간교육(人=八=∞)이 국가를 번창시키는 건 (∞)100까지도 가능하다고 봤다.
세계 최고(最古)의 벼농사 유물 볍씨
1994~2001년 기간 중에 우리나라 충북 청원군 소로리 일대에서 찍개, 긁개, 홈날, 몸돌, 격지 등 구석기 유물들이 매우 넓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습되면서 볍씨가 출토되었다.
흙속에 묻혀있는 볍씨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흙을 채로 쳐서 걸러지는 알갱이들을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조사해서 볍씨를 찾아내야 하는 일이다.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들을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 연구실에서 교차 측정한 결과,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절대 연대값을 얻게 되어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임이 판명되었다.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굴된 법씨의 모습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소로리 볍씨
즉, 인류의 약 60%가 쌀을 주식으로 먹고있는데, '벼'의 경작은 인류에게 있어서 '불'의 발견에 버금하는 기술혁신으로 인식하게 됨에 따라, 전세계 저명한 학자들은 인류의 발전과정과 관련하여 '벼' 경작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해 오고 있었다.
그간 1970~80년대까지는 주로 황하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발굴된 볍씨들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장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양자강 유역인 호남성 도현 옥섬암(玉蟾岩) 유적에서 출토된 볍씨가 1만 1,000년 전으로 밝혀지면서 이 주장이 굳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충북 청원군 '소로리 볍씨'가 출토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공인되게 되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와 양자강 유역인 호남성 도현 옥섬암 동굴유적, 강서성 선인동(仙人洞) 동굴유적, 하남성 하모도 유적 등 세계에서 오래된 볍씨들이 출토된 지역의 위치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세계 최고의 볍씨 출토 유적지
충북 청원군 소로리볍씨는 1994년 지표조사, 1996~1997년 시굴조사, 1997~1998년 1차 발굴조사, 2001년 2차 발굴조사, 2012년 시추조사를 통해 토탄층에서 볍씨 127톨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법으로 검증한 결과, 1만 5천 년 전 볍씨로 측정되었다.
이제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강서성 선인동(仙人洞)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의 10,500년, 또는 호남성 도현 옥섬암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볍씨의 11,000년보다 대략 3,000년을 더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임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그간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최고의 볍씨는 손보기·이융조 교수 등이 1991년에 일산 한강하류 부근에서 발굴한 12톨의 가와지볍씨로서 약 5,020년 전의 볍씨였다.
경기도 고양시는 2014년 3월에 '고양 가와지볍씨박물관'을 개관했는데, 국내 최초의 쌀 관련 볍씨유물 문화박물관이다. 또 지난 2016년 청주시 소로리에 세계 최고의 소로리 볍씨 출토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그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들이 출토된 유적들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1. 호남성(후난성) 영주시 도현 옥섬암(玉蟾岩) 유적
소로리 볍씨가 발견되기 이전,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옥섬암(玉蟾岩) 유적은 BP 10,000년의 동굴유적인데, 4립의 볍씨가 출토되었다.
감정결과 야생도의 특징이 남아있고 산류(인디카)와 갱류(자포니카)의 분화가 완성되지 않은 초기 재배도임이 확인되었다.
2. 강서성 만년(萬年)현 선인동(仙人洞) 유적
선인동 유적은 강서성 만년(萬年)현에서 동북으로 15km 떨어진 작은 산의 석회 용암 동굴유적인데, 196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유적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유적은 상하 2개의 문화층으로 나뉘는데, 불에 탄 소토(燒土), 구덩이, 다량의 동물뼈, 인골, 석기, 골각기, 조개껍질들이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 선인동 주민의 음식에는 이미 벼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절강성 여도(余姚)시 하모도(河姆渡) 유적하모도(河姆渡, 7,000~5,000년 경 추정) 유적은 1973년에 장강 하류지역인 절강성 여도(余姚)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미 학계에 널리 알려진 도작(稻作) 농경유적이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것은 하모도 제4문화층에서 큰 범위로 발견된 벼의 흔적이다. 도곡. 벼껍질, 경옆이 혼합된 상태로 두꺼운 문화층을 형성한다. 이처럼 벼의 양이 많고 보존이 양호한 유적은 중국 신석기시대 고고학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당시 도작(稻作) 농경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려준다. 벼는 재배도의 늦은 유형으로 확인되었다.
콩의 한반도 기원설
한반도와 만주 남부는 국토의 75% 이상이 산악지대로 초원(草原)이 귀해 목축하기가 어려웠어요
사냥을 하거나 적은 수의 가축들로 육류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육류섭취가 매우 어려웠어지요
이러한 육류섭취를 대체해준 작물이 바로 콩(豆)이었어요
그런데 콩의 원산지가 우리 한반도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콩은 우리 한민족과는 뗄레야 뗄수 없는 궁합 작물로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부족했던
단백질과 지방을 책임져 왔어요
단백질과 지방은 인체를 구성하는 핵심 성분 이지요
콩은 구성성분이 40% 내외의 단백질과 30% 내외의 지방으로 이루어져 있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부족하기 쉬운 단백질과 지방을 공급하는 중요한 공급원이었어요
그래서 한반도에서는 50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 목축이 발달하지 못했음에도
콩 덕분에 단백질과 지방 결핍에 시달리지 않고 잘 살수 있었지요
우리 민족이 유목민족이 되지 않고 기마민족으로 한반도를 지킬수 있었던 힘이
바로 콩 덕분이라 하지요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콩의 원산지를 만주 남부와 한반도로 보고 있으며
약 5000년전부터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한반도에는 신석기시대부터 밭농사가 지어졌는데 북한의 회령,오동 고조선 유적지에서
기원전 1300년경의 청동기 유물과 함께 콩, 팥, 기장이 출토(出土)되었어요
이런 물증으로 보아 콩의 원산지는 한반도라는 것을 확인할수 있지요
실제로 콩의 원산지가 한반도임을 뒷받침하는 실증적인 조사도 있었어요
1920년대 미국은 세계 식량종자 확보를 위해 세계 각지의 야생작물 채취에 나섰지요
그들은 한반도에서 3개월 동안 활동하면서 전세계 야생 콩 종자의 절반이 넘는
무려 3,379종의 야생 콩을 채취해 가지고 갔어요
식물의 원산지를 추정할때 변이종의 다양성이 그 기준이라 하는데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콩의 변이종이 발견된 것이지요
이렇듯 다양한 야생콩이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므로 해서 한반도가
콩의 원산지임을 실증적으로 입증된 것이라 말할수 있어요
콩을 뜻하는 한자 두(豆)는 원래 고기를 담던 그릇을 말하고 있지요
일부에서는 콩깍지가 이 그릇을 닮아 콩 두(豆)자로 썼다는 말도 있지만
두(豆)는 원래 긴 밑받침이 있는 그릇으로 제사상에 제기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요
따라서 두(豆)는 고기(단백질)와 연관이 있는 글자로 볼수 있지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콩 두(豆)자가 콩의 뜻으로 쓰인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요
이 콩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중요한 곡식이었어요
콩의 종류는 무척 많지만 가장 흔한 콩이 대두(大豆)이며 모든 콩의 주종을 이루지요
대두의 상대적인 개념은 소두(小豆)라 하는데 소두는 팥을 이르는 말이지요
보리가 대맥(大麥), 밀이 소맥(小麥)인것처럼 종류가 비슷할때 덜 중요한것에 '소(小)' 자를 붙였어요
그러므로 우리 일상생활에서 콩보다는 팥이 덜 소중했지요
하지만 늘 팥은 콩과 함께 짝을 이루었어요
'콩쥐팥쥐' 같은 말을 보면 콩도 팥도 우리와는 오래전부터 친숙한 식물이었지요
우리는 부여나 고구려가 콩의 원산지였기에 중국의 중원보다 훨씬 일찍 콩과 친숙할수 있었어요
백제나 신라도 고구려로부터 콩을 받아 들였지요
그렇기에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다양한 콩 조리법이 발달할수 있었어요
중국도 춘추전국시대에 콩을 만주 지역으로부터 받아들였고
콩의 재배가 일반화된 것은 진한시대 부터라 하지요
일본은 약 2000년 전에 한반도를 통해 콩을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삼국시대때 일본과 한반도의 긴밀한 접촉으로 보아 그때 일본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때부터 일본도 콩을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콩 쓰임새를 보면 콩을 정말 오래전부터 먹어왔음을 알수 있지요
그런데 이 콩이 밥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주곡(主穀)과는 사뭇 달랐지요
물론 밥에 콩을 직접 넣어 주곡으로 먹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 재료일 뿐이었어요
콩은 주식이기 보다는 메주를 만들어 된장과 간장을 뽑아 먹고, 갈아서 두부를 만들어 먹고
콩나물과 숙주나물로 키워 나물로 먹는 '반찬'의 역할을 많이 했지요
간장에 졸여 만든 콩자반을 반찬 삼고, 볶아서 간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콩소, 팥소, 녹두소, 콩가루는 떡의 맛을 내는 보조 재료 였어요
또 콩을 볶아 압착해서 짜낸 콩기름은 참깨에서 나온 참기름과 함께 부엌에서 쓰던 기름의 주종이었지요
이렇게 보면 콩은 오히려 곡식이 아니라 반찬으로 많이 사용되어 왔음을 알수 있어요
쌀, 보리, 기장, 조처럼 주곡으로 먹기보다는 밥과 함께 먹는 반찬의 재료로 쓰일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요
물론 채소와 나물, 고기반찬도 추가되겠지만 기본적인 골격으로는 쌀, 보리, 조가 밥이 되었고
콩은 반찬에 불과 했어요
이는 영양이라는 측면에서 볼때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몰라요
농경 생활에서 고기나 생선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한 탄수화물 중심의 주곡에다
콩으로 단백질을 보충하므로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말할수 있지요
아무튼 ,콩의 재배는 다른 곡물(쌀, 기장, 조, 수수)보다 훨씬 늦은 기원전 20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다.
콩의 원산지에 관해서도 많은 설이 있었다,
일본의 후쿠다(福田, 1933) 박사는 야생콩의 분화가 많이 된 곳이 원산지라는 주장을 토대로 만주와 한반도를 원산지로 보았다.
미국의 하이모위츠(Hymowitz, 1970)는 중국 주나라의 시를 수록한 시경(詩經, 기원전 11-6세기)에 콩 숙(菽)자가 있다는 근거로 중국을 원산지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권신한(1985)은 한국 재래종이 현재까지 세계 각국에서 보고되어 있는 콩이 지니는 각종 특성을 모두 보유하고 있어 한국이 콩의 원산지라고 결론지었다.콩을 재배하고 이용한 확실한 증거는 신석기 중기 이전의 유적에서는 발견된 것이 없다.
중국에서는 용산문화기(기원전 3000-2000년)와 상(商)나라 시대까지의 유적에서 콩이 다수 발견되었으나, 최근 미국 오레곤주립대학의 이경아(2012) 교수는 한·중·일 삼국에서 신석기시대에 발굴된 949개의 탄화콩에 대한 크기를 측정하여 비교한 결과 한반도 초기 무문토기시대(기원전 1600-600년)의 탄화콩들이 길이(L)와 넓이(W)가 뛰어나게 큰 대두(大豆)임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양사오,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콩들은 대부분 야생콩이며 재배콩은 기원전 2000년경의 한반도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유력해 진다.기원전 6세기에 쓰여진 일주서(逸周書)에는 중국 동북지역의 콩이 처음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는 ‘산융(山戎)은 동북이이(東北異夷)다. 융숙(戎菽)이 나는데 큰콩(巨豆)이다’라고 쓰여있고, ‘서주(西周, 기원전 7세기)가 상(商)을 정벌하고 조공을 받는 과정에서 산융에서 보내온 콩, 융숙(戎菽)을 받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일주서의 내용과 비슷한 기록들이 사마천의 사기와 중국 고전 관자(管子)에도 나온다.
홍콩대학의 호핑티(何炳棣, 1975) 교수는 이에 근거하여 재배 콩은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볼 때 퉁구스족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대한해협의 원시토기문화시대(기원전 8000-5000년)를 거치면서 한반도의 원주민들은 어로 채집과 지역에서 자생하는 벼, 기장, 조를 비롯한 곡류채식문화를 점진적으로 발전 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기마 유목민족이었던 북부지역의 퉁구스족이 한반도로 들어와 농경 정착을 하면서 가축을 많이 기를 수 없게 되므로 고기를 대체할 안정적인 단백질 급원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그들은 이 지역에서 자생하던 콩을 재배하여 물에 불린 후 토기에 담아 삶아 냄으로서 트립신인히비터와 같은 영양 저해인자를 제거하는 기술을 개발했을 것이다.
따라서 동이(東夷) 예맥족(濊貊族)은 인류사상 최초로 콩을 음식으로 이용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동북아시아인의 주식인 쌀과 콩의 기원지가 한반도일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2. 세계최고 배(추정)
경남 창녕 비봉리 출토 통나무배와 패총
- 창녕 신석기 유적서 4m짜리…“세계최고 추정”
한국사람들은 8천년전에 이미 배를 만들어 타고 다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8천년전 배가 경남 창녕군에서 발견되었다.(2005년도)
조선(朝鮮)에서 조선(造船: 배만들기)이 생긴 것.
2004년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에서는 약 6~7천년 전의 통나무배의 일부가 출토 되었다. 배는 발견 당시 동서 방향으로 놓여 있었고, 강 쪽을 향해 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확인된 실물 기준으로 이 배는 최대 길이 3m10㎝, 최대 폭 60㎝, 두께 2.0-5.0㎝, 깊이 약 20㎝가 된다. 어디가 뱃머리이며 고물(船尾)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폭이 상대적으로 좁아지고 있는 형국을 연출하고 있는 동쪽 부분이 선수가 아닐까 조사단은 추정했다.
이 배는 가운데를 잘랐다고 했을 때 U자형이며 속을 파내 만든 통나무배이다. 선체는 전체가 고르게 가공돼 있으나 선수부가 약간 더 두껍다.
임학종 학예연구실장은 "원래 선체는 4m를 넘었다고 추정된다"면서 "철기나 청동기 같은 금속기가 발명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치밀하게 가공한 흔적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배를 만들기 위해 당시 사람들은 통나무를 군데군데 불에 태운 다음 돌자귀 같은 날카로운 석기를 이용해 깎아내고, 다시 갈돌과 같은 기구로 표면을 정리하는 방식을 구사했음이 드러났다. 이를 증명하듯 선박 곳곳에는 불에 그슬려 가공한 흔적인 초흔(焦痕)이 발견됐다.
배를 제작하는 데 쓰인 나무는 필자가 표본을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분석해본 결과 나이테 폭이 비교적 넓고 고른 것으로 보아 산자락 부분의 땅이 비옥한 곳에 자란 약 200년 전후의 소나무임을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 한국에서 출토된 고려시대 이전 선박 실물로는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시대 배(8세기),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11세기), 안좌도선(13~14세기), 달리도선(14세기) 등이 있다.
8,000여년 전 소나무로 제작된 이 통나무 배는 어로생활 등 신석기시대 초기의 생활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데다, 정교하게 가공된 배는 원시적이고 미개하다는 신석기시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깨고 당시 기술수준이 생각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날 현장을 찾은 정징원 부산대 교수는 "배를 다룬 솜씨로 볼 때 당시의 기술수준이 상상 외"라며 "이 배는 고기를 잡거나 이웃집단과 교류하는 데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 배는 특히 세계적으로도 출토 유례가 드물다. 배 유물이 많은 일본의 가장 오래된 배 도리하마 1호(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보다 2,000년이나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는 중국의 신석기시대 것 외에 이집트, 터키 등에서 선사시대 배나 배 관련 유물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껏 국내에서 나온 배 유물로는 경주 안압지에서 나온 8세기께의 통일신라 배를 비롯해 완도선과 십이동파도선(11세기), 안좌도선(13~14세기), 달리도선(14세기) 등이 있는데, 모두 역사시대에 해당한다. 국립 해양유물전시관 도록 등 국내 자료를 보면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의 도리하마 1호, 이키리키 유적 출토품 등이 선사시대의 배 유물로 꼽히나 창녕 배 유물의 추정 연대보다 2000년 이상 뒤진다. 서구 쪽 발굴 사례로는 1954년 이집트 쿠프왕 피라미드 옆에서 발굴된 4600여년 전의 고선박과 60년대 터키 겔리도니만 바다 밑에서 발견된 기원전 13세기 난파선 등이 보고돼 있다.
곽유석 국립 해양유물전시관 학예사는 “세계 각지의 고대 배 출토 사례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아 단정은 어려우나, 창녕 유적의 배 유물 연대가 8천년 전으로 확정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선박 유물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배만들기(조선)도 한국이 세계 최초 <- 관련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거북선이 괜히 한국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 듯. 한국이 배만들기 세계 최초인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이미 8천년전에 고래잡이와 목축를 했다고 영국 BBC도 보도했다.(2004년도)
3. 고래잡이 암각화
언양읍 대곡리에는 경승지인 반구대가 있는데 연고산의 한 자락이 뻗어 내려와 이곳에 와서 우뚝 멎으면서 기암괴석으로 절정을 이루고 있으며,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이므로 반구대(盤龜臺)라 한다. 두동면 천전계곡(川前溪谷)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옥류가 이곳에 모여 호반을 형성하니 절승가경(絶勝佳景)으로 이름이 높다. 그래서 옛날부터 경향각처의 시인묵객들은 이곳을 찾아 시영(詩詠)으로써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암각화란 선사시대의 사람들이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들을 주제로 삼아 그것을 바위에 새겨서 그린 그림이다. 주로 커다란 바위 등 집단의 성스러운 장소에 그렸는데,사람들은 그곳에 모여서 각종 의례를 거행하였다고 추측된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는 태화강의 한 지류인 대곡천의 소위 ‘건너 각단’ 이라고 부르는 곳에 그려져 있으며,그림이 집중된 곳의 바위면의 크기는 너비 10m, 높이 3m이다. 그러나 그 좌우에서도 적지 않은 형상들이 확인되고 있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모두 10여개에 이른다. 이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되었으리라 여겨지며 시대별 양식의 차이를 살필 수 있는데, 표현 대상의 내부를 모두 쪼아낸 면쪼기 (面刻, 모두쪼기) 기법과 윤곽만을 쪼아낸 선쪼기(線刻) 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새겨진 물상은 크게 바다동물과 육지동물, 사람, 도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바다동물로는 고래, 물개, 거북 등이, 육지동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개 등이 많이 보인다. 사람은 얼굴만 그려진 경우와 바로 선 모습, 옆으로 선 모습, 배에 탄 모습 등을 볼 수 있다. 도구로는 배, 울타리, 그물, 작살,노(弩)와 비슷한 물건 등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동물과 사냥 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살필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이처럼 인류 최초 포경기록이자 한반도 최초 미술작품 반구대 암각화 및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천전리각석(발굴50주년)은 대한민국 대표 역사 관광 자원이다.
반구대 암각화 - 영국 BBC “한국이 고래잡이 세계 최초” <- 관련 기사
4. 세계 최초 신석기유물 - 2만년이상전 (전남 장흥군 출토)
게다가 2004년 한국에서는 경악스럽게도 2만년전 신석기가 발견되었다. (전남 장흥군)
전에도 구석기 유적인 [경남 진주 장흥리 집현]과 [대전 용호동]에서
각각 1기씩 마제석기(갈아만든 석기)가 출토되었었는데 그래도 설마설마 하다가 이번엔 아예 숫돌까지 발견된 것.
전남 장흥군의 2만년전 신석기 사진
세계최초의 2만년전 신석기가 한국에서 발견되었다. <- 관련 기사
세계 고고학계가 경악한 사건이다.
그전까지는 약 1만년 전에 중동(아랍)에서 신석기가 최초로 생긴 줄 알았었다.
세계고고학계는 일명 [1만년전 신석기혁명]을 통하여
세계가 처음 신석기를 쓰게 됐다고 보고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무려 2만년전 신석기가 발견됨으로해서
[1만년전 신석기혁명] 이론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하겠다.
한반도 중부, 남부는 고대에 [마한]이라고 불려졌던 곳.
마한은 한자로 마한(馬韓), 마한(麻韓), 마한(摩韓) 등으로 표기됐는데
마한(摩韓)의 마(摩)는 [갈 마] 자.
숫돌 같은 것에 뭔가를 간다는 얘기.
이 마한 지역에 속한 전남 장흥에서 최고(古)의 신석기가 발견되었으니
왜 마한을 마한(摩韓)이라 이름 붙였는지 다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제주도 고산리에서 1만년 이상 전 토기가 발견되었다.
이는 연해주(시베리아동부)의 1만년 이상 전 토기와 같은 시대의 것으로
기존에 세계 최초라던 수메르문명보다 수천년 빠른 세계최초의 것.
5. 세계 최초 토기 출토 - 1만수천년이상전
(제주도 고산리 출토) 제주 고산리 원시무문토기
빗살무늬토기도 한국이 원조.
빗살무늬토기도 한국에서 시작된 것. ( 8천년전 빗살무늬토기 -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빗살무늬토기는 한국에서 시작하여 시베리아 , 유럽으로 퍼져나간다.
( 예전에는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에서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했는데
가면갈수록 한반도에서 시베리아 보다 앞선 시대의 것들이 발견되고 있음. )
말하자면 [빗살무늬토기길] 등을 통하여 [한반도-만주]에서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유럽으로 갔고
유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한반도-만주]로 왔다.
이렇게 한국의 빗살무늬토기가 세계로 퍼져 나갔듯이
한국의 고인돌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한국에는 8천년전 고인돌도 있고 (전남 화순)
지금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즉 김치가 한국이 원조인 것처럼 고인돌도 한국이 원조인 것.
고인돌은 특히 남한지역에 많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돌도 남한에 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가 죽듯이
뿌리 잃은 민족은 죽.는.다.
http://www.hanyangi.net/board/newsView.asp?n_id=100
6. 고인돌 세계 최초 - 8천년이상전 (전남 화순군)
전남 순천 고인돌
전북 고창 고인돌
최소한 8천년전부터 만들어온 한국의 고인돌.
가히 [한국의 상징] 중의 하나가 [고인돌]이라 할 것이다.
중국 산동반도는 고대부터 한민족과 연관이 많은 곳이고, 많은 한민족이 건너가서 살았던 곳.
한국의 문명전파는 이것 뿐만이 아니다.
유전자로 살펴 본 "황해대평원"
이제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빗살무늬토기의 전파방향, 헬리코박터 유전자 분포, 동아시아 유전자 분포...
위와 같이 밝혀진 다양한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결국 황해대평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만든 유전자 지도
또한 얼마전 중국등 몇개국이 모여 아시안 인종의 유전자를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 아래와 같은 그림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위의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 있다.(한국생명공학연구원(원장 박영훈·생명연 발표)
즉, 간빙기 인류이동 경로가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대륙붕(연한 회색)이 인류가 걸어다닐 수 있는 공간인 점을 무시하고, 오늘날과 같이 바다에 의해 왕래가 불가능한 상황에 맞추어 연구결과를 발표한 우를 범했다.
즉, 위의 그림에서 주의해서 볼 점은 화살표의 방향이 모두 합해지는 방향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위의 그림에서 중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해간 인류에 대해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처음 그림에서와 같이 당시 그 지역은 빙하지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 그림의 빨간점 부분으로 모든 화살표가 집중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를 다시 생각하면 그 지점으로부터 인류의 전파가 이루어졌다는 역설이 가능하다.
주지하건데 그 부분에 해저 피라미드(거석문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이는 황해대평원으로 가는 길목이며, 풍천장어가 산란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쉽게 생각하면 빨간 지점에서 한반도로 걸어가면 될 일을 멍청한 인류가 중국대륙을 통과하여 한반도로 거꾸로 내려온 것으로 밝힌 것이다.
유전자의 전파경로
당뇨병(기근유전인자, 먹을거리가 부족한 빙하기를 견딜 수 있는 절대 유전자, 풍족해지면 당뇨병 발생)은 채식, 쌀 중심의 식습관을 가진 사람(저칼로리 음식)이 고칼로리 음식을 섭취하였을때 발생하는 비만(위처짐 현상)에 의한 인슈린관 압착 및 이로 인한 인슈린 분비가 적었을때 발생하는 병이다.
그런데 이병을 가진사람의 대부분은
a. 몽골로이드계(피마인디언) 여자 67%, 남자 70%
b. 인도계 싱가포르인 34%
c. 이슬람계 모리샤스인 25%
d. 말레이계 싱가포르인 23%
e. 인도계 모리샤스인 22%의 당뇨병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WHO)가 1997년 발표하였다.
굳이 부도지를 비교한다면 황하, 메소포타미아,인더스 문명,,,의 사람들이 다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그 뿌리가 같다는 것이다.
개의 기원(동아시아, 유라시아 등등등) 그 중 최고의 개는 진도개...특이유전자 다량...확인
가축을 최초로 키운 인류는 누구일까요?
결국 이 문제는 무덤을 파 보는 방법외에는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견된 무덤에서 다양한 가축의 뼈가 가장 오래전에 묻힌 사례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는 것이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발견한 내용입니다.
더구나 개는 인류와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진도개는 어떨까요?
개가 처음 사람에게 길들여진 지역은 동아시아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최신 연구 결과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들도 유망주로 새로 떠올랐다고 BBC 뉴스가 보도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동아시아 지역 개들에게서 폭넓게 나타나는 유전적 다양성 때문에 이 지역을 길든 개의 발원지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미국 코넬대의 애덤 보이코 교수 등 국제 연구진은 이집트와 우간다, 나미비아의 여러 마을에서 채취한 개들의 DNA를 분석한 결과 그 다양성이 동아시아 못지 않게 풍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최신호에 발표했다.
오늘날의 개는 약 40만년 전부터 1만5천년 전 사이에 길들여진 유라시아 회색늑대의 자손이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들이 사람에게 길들여졌는 지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구진은 이집트와 우간다, 나미비아의 여러 마을에서 채취한 개 318마리의 DNA를 분석했다.
이들이 마을 개를 택한 것은 사육된 개에 비해 유전적 다양성이 훨씬 풍부해 개의 가축화 과정을 추적하기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와 함께 살루키, 로디지안 리지백, 파라오 하운드 등 아프리카 원산으로 알려진 개들의 유전자도 함께 분석해 푸에르토리코 도시의 떠돌이 개 및 미국의 족보 없는 개처럼 아프리카와는 관계없는 개들의 유전자와 비교했다.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마을 개들은 동아시아 개들만큼 유전자 다양성이 풍부한 것으로 나타나 개 길들이기가 동아시아에서 시작됐다는 가설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연구진은 "동아시아 기원설은 분석에 사용된 개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주로 도시의 떠돌이 개들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동아시아의 개들이 유전적으로 더 다양해 보인 원인은 이 지역 개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다양해서가 아니라 족보 없는 개나 마을 개들이 사육견보다 유전적으로 더 다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다 해서 동아시아가 처음 개를 길들인 곳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으며 다만 회색늑대와 인간이 공존했던 유라시아 대륙 어딘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보이코 교수는 연구 결과 모든 개에게서 회색늑대의 DNA가 나타났으며 따라서 개가 유라시아 늑대의 후손이라는 가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오늘날의 아프리카 마을 개들은 먼 옛날 아프리카로 들어온 다양한 토종 개들이 섞인 것임을 밝혀냈다.
이들은 또 원산지가 아프리카로 잘못 알려진 일부 종들의 발원지를 밝혀냈는데 예를 들어 살루키는 오늘날 이집트 마을 개와 같은 DNA를 갖고 있으며 아프간 하운드 역시 이름과 달리 이집트 마을 개와 친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라오 하운드와 로디지안 리지백은 아프리카 토종 개들과는 공통점이 없어 이들의 조상이 아프리카 개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연구진은 포르투갈에서부터 파푸아 뉴기니에 이르는 유럽 및 아시아 전 지역의 떠돌이 개 및 마을 개들을 대상으로 유전자 다양성이 가장 풍부한 지역이 어딘지 추적하는 새로운 연구에 착수했다고 한다
한편 141개의 진도개 특이적 발현 유전자가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농촌진흥청(이하 농진청)은 진도개사업소와 공동으로 진도개의 간 및 뇌 조직으로부터 2만 여개의 발현유전자의 염기서열을 결정했고 141개의 특이적 발현 유전자를 찾아냈다고 밝혔다.농진청에 따르면 이들 유전자는 진도개의 다양한 모색이나 체형을 결정짓는데 중요할 뿐 아니라 충성심, 귀소성 및 청결성 등과 같은 품성을 좌우하는데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또한 이 유전자들 중에는 25개의 보고되지 않은 유전자들도 발견됨으로써 추후 논문 등에 새롭게 보고함으로써 진도개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학술적 의미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되고 있다.진도개와 독일셰퍼드의 간과 근육에서 차등발현유전자를 대량유전자발현 칩을 통해 간에서 18개, 근육에서는 71개의 차등발현 유전자가 탐색됐고 이는 진도개의 생리적인 특성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실제 진도개의 간에서 인슐린 신호전달 체계와 관련되어지는 단백질 카이네이즈 계열 유전자가 독일 셰퍼트보다 유의적으로 많이 발현됐고 근육에서 근육생리와 관련되는 지방대사 및 질소대사 관련 차등발현유전자가 탐색됐다고 농진청은 설명했다.농진청 라승용 국립축산과학원장은 "이번 진도개만의 독특한 유전자를 발견함으로써 국내적으로 진도개의 명견화를 통한 반려동물산업의 국민적 관심을 유도하고 세계적으로 우리의 고유의 토종동물자원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환조선의 도시(천부도) 문화재 출토
천부도의 제 23장엣서는 아래와 같이 천부도의 건설를 언급합니다.
물론 환단고기와 환단신화에서도 비슷한 언급을 합니다.
임검씨가 돌아와 부도를 건설할 땅을 택하였는데 동북의 자방(磁方)이었다.
이는 26이 교감하는 핵심지역이요, 48이 상생하는 결과의 땅이었다.
밝은 산과 맑은 물이 만리에 뻗어 있고, 바다와 육지가 서로 통하여 10방으로 갈리어 나가니,
즉 91의 끝과 시작이 다하지 않는 터전이었다.
3근영초와 5엽서실과 7색보옥이 금강의 심장부에 뿌리를 내려, 전 지역에 두루 가득하다.
이는 1357의 자삭(磁朔)의 정(精)이 모여 바야흐로 물체를 만드는 복된 땅이었다.
곧 태백산 밝은 땅의 정상에 천부단을 짓고 사방에 보단을 설치하였다.
보단의 사이에는 각각 3 겹의 도량길로 통하게 하였다.
도랑길의 사이는 천리였으며, 도랑길의 좌우에 각각 관문을 설치하여 지키게 하였다.
이는 마고본성에서 그 법을 취한 것이었는데 부도의 하부를 나눠 마을을 만들었다.
3해의 주위에 둥그렇게 못에 잠기었다.
4진(四津)과 4포(四浦)가 천리 간격으로 연결되어 동서로 줄을 지어 둘러쌌다.
진과 포사이에 다시 6부를 설치하였고 이에는 제족이 살았다.
부도가 이미 이루어지니 크고 화려하고 광명하여 4해를 총화하기에 충분하였으며 제족의 생명줄이었다.
환단문명은 환단역학의 원리를 구현한 재세이화홍익인간의 산물이라고 합니다.
그당시의 지도자들은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목적으로 가지고
문명을 건설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환단문명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환단문명의 최고가치는 무엇일까요?
이렇게 자문한다면...
어떤 이들은 환단문명의 화려한 역사와 광범위한 영토를 건설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실들의 집합체는 일장춘몽일 겁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다만 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겁니다.
문명을 건설하면서 알게된 지혜 일 겁니다.
이 지혜의 핵심이 바로 천문학이고 과학적인 지혜일 겁니다.
과학이야말로 인간의 위상을 신의 경지로 올려 줄 수단이 아닌가?
그렇다면 환단문명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바로 환단문명을 이룩한 최고의 가치인 천문역학에 관한 지혜를 습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환단역학의 존재와 가치는 제로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서 가치는 있는 것이 남겨져 있는 것일까...
사실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환단문명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남겨진 것은 있는 것일까?
우리의 기나긴 역사를 보면 가련하기가 그지없어 보입니다.
남의 영토를 침략해서 노획한 적도 없고 대부분의 세월이 외족에게 종속되고 근대에서는 서구열강과 왜족에게 식민지당하고 더구나 인류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힘든 세계전쟁이 한반도 영토안에서 벌어지고...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우리문명의 역사니 뭐니하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가장 지저분해보이는 곳에서 장미같은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생명들이 생의 활기를 즐기듯이
지금까지 역사적인 궤적으로 보면 별볼일 없는 지역인 한반도에서 의외의 가치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우리환단문명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천문역학인데 이를 황제역학이라고도 합니다.
천부도지에서는 천웅의 도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태백일사에서는 황부중경, 삼황내문경, 칠정운천도 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황제역학은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학문이었습니다.
황제역학은 황제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계승과정과 전수과정이 극도하게 비밀주의로 이루어집니다.
환단문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천문역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천문역학은 오늘날 과학의 개념에 해당합니다.
사실 환단역사를 기록한 고서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 바로 재세이화 홍익인간의 나라의 건설이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세이화의 개념이 빠져있습니다.
홍익인간의 개념만 등장합니다.
홍익인간이라는 말은 좋은데 뭔가 빠져 있습니다.
홍익인간을 어떻게 실현하고 현실화하는가 이를 어떻게 객관화하는가의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재세이화의 구체적인 개념이 바로 천문역학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증거하지 못하면...
홍익인간이란 거짓이고 기만이라고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천문역학의 본질을 알아야 홍익인간이 가능합니다.
다시말하자면 황제역학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 재세이화의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신화와 전설만이 난무합니다.
환단문명의 진정한 영혼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없을까요?
물론 역사의 강자인 호랑이세력들에게 밀려나버려서 그런겁니다.
고대시절부터 유행병처럼 만연된 양육강식의 역사에서
역사기록은 승리자의 일기장이라고도 합니다.
그 희생자, 패배자들을 위로하는 역사일기장란 존재할 수가 없으니..
우리가 복된 미래를 도모하려면 그 잃어버린 천문역학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한빈도는 이미 한단문명의 영혼이 깃들여 있던 보금자리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첫발이 우리의 고유한 천문역학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1980년부터 요하강일대에서 본격적으로 발군된 이른바 요하문명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뿌리는 누구인가?
우리의 문명과 역사를 스스로 환단의 역사라 부른다.
또한 이 환단의 역사를 동이문명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도대체 환단의 역사란 무엇일까.
여기에 다양한 답을 내놓을 수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필요에서가 아니라 탐구적인 자세로 환단의 모든 역사를 고증해야만 합니다.
환조선문명의 핵심되는 유물은?
환단의 환은 무엇이며, 단은 무엇을 나타낼까.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겠지만 환(桓)은 하늘의 광명을 나타내며, 단(壇)은 땅의 광명을 나타낸다고 한다.
따라서 환단(桓檀)이란 환의 하늘과 단의 땅이 하나로 된 천지광명을 나타내는 인(人)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기하학의 개념으로 마하자면
1차기하학의 개념으로는 수학의 황금비의 상수이다.
2차 기하학은 직각 삼각형이다.
3차기하학은 구체( sphere)이다.
수열의 의미로는 피보나치 수열이라고도 한다.
보이지 않는 구슬이란 원의 체적을 의미한다. 이 체적이 황금비이고 우주혼이라고 하였다.
황금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주의 몸통이고 우주혼은 전자입자이다.
천문역학에서 굉장한 비율개념이고 오늘날 양자역학에서 소입자에 해당한다.
광자의 쌍인 굴루온의 개념이다.
물리학적으로 규정하면 오늘날 빛의 개념과 동일하고 글루온이다.
전자 자유전자의 개념과도 동일하다.
(이외에 황금비의 정확한 개념에 대하여서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참조하세요)
결국 환의 개념은 기하학에서는 원방각이고 물리학으로는 천지인이면 기화수토를 수용한 우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조상들은 이에 인의 개념을 보태어 이 인(人)을 한(韓)이라 하며 인광(人光)이라 한다.
단군시대의 삼한관경의 3체제는 이후에도 게속 이어진 것이고 대한제국을 거치면서 현재까지 이어진다.
환단(桓檀)이란 천지인의 삼일사상이 내포된 한(韓)의 인간(人)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한(大韓)은 환단의 인류가 사는 위대한 나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일제시대 일제의 치하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의 대한의 정신이 여기에 숨어있는 것이다.
결국 환단(桓檀)이란 천지인(天地人)을 말하는 것이며 환단경전인 천부경의 핵심되는 개념이다.
우주는 천지인이다. 그러므로 천지인의 사상이고 환단(桓檀)이 의미하는 천지인의 합일은 바로 우리문명의 위대한 삼일사상을 잘 대변하고 있다.
결국 환단(桓檀)문명의 우주론 철학은 천부경(天符經)이다.
물론 이 경전의 가르침을 통하여 환단의 문명이 철학 종교 수리학 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다차원의 문화를 형성하고 계승발전시키게된다.
천부경은 환단문명의 씨앗과도 같은 것이다.
천부경을 모태로 하여 황부중경과 황제중경, 칠정운천도, 그리고 삼황내문경과 삼일신고 참전계경등의 다양한 경전을 낳는다.
천부경을 통하여 환단의 책력과 역사관이 형성되는데 천부도지와 환단고기, 다군신화등의 역사서가 등장하게된다.
천부경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숫자가 만들어 언어가 형성되게 된다.
녹도문자인 한문(韓)과 숫자인 가림다의 한글이 생기게 되어 오늘날까지 한글은 환단 문명의 문화적 징표로 되고 있다.
천부경을 모태로 하여 하여 역학이 탄생하게 되는데 신시시대의 환역과 희역, 단군시대의 주천력과
8괘상중론과 천부도 성법체역학, 그 이후에는 금척으로 정립하게 된다.
천부경을 모태로 하여 천문수리학이 정립되는데 피라미드의 기하학이 원방각의 기하학으로 원방각의 기하학인 성법체의 수리학으로 성법체의 수리학이 금척의 수리학으로 정리된 것이다.
천부경의 가르침에 의하여 다양한 문화재들이 생기게되는 데 이 문화재속에는 불멸의 환족의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자손들은 다양한 문화재 속에 깃들인 불멸의 연혼과의 만남을 통하여 진실을 알고 실천함으로서 홍익인간을 구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홍익인간은 세상의 돌이가는 이치를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즉, 홍익인간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라 환단경전을 잘 익히면서 우주운행의 이치를 잘아아야 성사될 수가 있는 것이다.
환조선 문명의 5대 경전
환단문명이 경전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는 부도지와 환단고기의 두종에서 전해진다.
부도지에서 전해지는 것은 구체적으로 천웅의 도이고 부도역학으로 책력을 그 예로 한다.
즉 부도지의 역사내용은 천부도의 철학인 성법체의 역학을 구체적으로 책력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도지는 경전의 세계관을 문명사에 반명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에 비하여 환단고서는 여러가지의 관련 역사서를 취합하여 정리한 것으지만
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료를 반영하였다.
특히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서 제시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정리하면 아래의 6가지로 정리된다.
1. 천부경
2.삼일신고( 원방각)
3.칠정운천도- 윷판모형 ( 주비산경)
4.황부중경(황제중경)- 천부도지
5.삼황내문경(천지인의 의학) - 티마이오스
6. 금척(황금비척도) - 천상열차 분야지도, 훈민정음과 칠정산 내외편 - 징심록 추기 - 금척대훈장
다음은 이를 적용한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1. 천부경
天 符 經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鋸無匱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妙
衍萬往萬來用變不同
本本心本太陽昂明人
中天地一一終無終一
우주 만물은 하나에서 나오고 하나에서 비롯되나,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하나이며 본래부터 있어 온 하나이다. 하나는 하늘과 땅과 사람 세 갈래로 이루어져 나오지만, 그 근본은 변함도 없고 다함도 없다. 하늘의 본체가 첫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을 바탕으로 땅의 본체가 두 번째로 이루어지고, 그 하늘과 땅을 바탕으로 사람의 본체가 세 번째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변함없는 하나가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의 순서로 완성되면서 새로운 하나를 이룬다. 이 새로운 하나는 한정도 없고 테두리도 없다. 이 새로운 하나가 바로 형상화된 하늘과 땅과 사람이다. 형상화되기 이전의 하늘, 땅, 사람과 형상화된 하늘 땅 사람이 어울리면서 음과 양, 겉과 속, 안과 밖이 생겨난다. 하늘에는 밤과 낮이 있고 땅에는 물과 뭍이 있으며, 사람에게는 남녀가 있어서 이 둘의 조화를 통해 천지는 운행을 하고 사람과 만물은 성장․발달해 나간다. 이렇듯 하늘과 땅과 사람이 원래의 근본상태, 형상화되기 이전의 상태, 형상화된 상태, 형상화되기 이전과 형상화된 상태가 어울려 작용하는 상태, 이 네 단계를 거쳐 우주만물이 완성되며, 우주 만물은 본래 따로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이렇게 하나가 묘하게 피어나 우주 만물이 형성되며 그 쓰임은 무수히 변하나 근본은 다함이 없다.
마음의 근본과 우주만물의 근본이 하나로 통할 때 일체가 밝아진다. 이렇게 마음을 밝힌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녹아 들어가 있다. 우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에서 끝이 나지만, 이 하나는 하나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의 하나이며 끝이 없는 하나이다.
2. 황부중경
1) 발귀리의 천제송문
2) 자부선생의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 칠성력의 시작
3) 삼일신고
4) 환역, 희역, 환희역 - 숫자와 환역상수( 녹도 가림다 )
5) 팔괘중론 창기소의 오행치수법
3. 삼황내문경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義)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삼청궁(三淸宮)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靑邱國) 대풍산(大風山)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名華)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 것이다.
경문은 신시(神市)의 녹서(鹿書)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推演)하고 주(註)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神仙陰符)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진나라 이래로 도가(道家)의 무리들에 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鍊丹服食)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方術)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는 망했지만 역시 회사(淮泗)의 출신이기에 평소 진나라을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의 기이(紀伊)에 서불(徐巿)이라는 제명(題名)의 각자가 있다. 이국(伊國)의 신궁(新宮)에는 서불(徐巿)의 묘지요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巿)은 복(福)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4. 황제중경 ( 단군임검시대)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虞司空)에게 가로되, 「나는 북극 수정(水精)의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三神上帝)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의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神針)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皇鋸宗)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三寶)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천제 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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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시때 발귀리의 제천송문
대일(大一) 그 극(極)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良氣)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三一)은 그 체(體)는 일(一)이요, 그 용(用)은 삼(三)이라.
혼묘(混妙)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體)와 용(用)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大虛)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神)의 형상(像)이고
대기(大氣)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神)의 화(化)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 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衷)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圓覺)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 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圓)은 일(一)이 되어 무극(無極)이고
방(方)은 이(二)가 되어 반극(反極)이며
각(角)은 삼(三)이 되어 태극(太極)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一神)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性)은 광명(光明)에 통(通)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 홍익인간(弘益人間)함은 이를 신시(神市)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2. 원방각원리
환역(桓易)의 체(體 : 모습, 외형)는 원(圓)이며 용(用 : 쓰임)은 방(方)이다. 모양 없음으로부터 실(實)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理)다. 희역(羲易)의 체(體)는 방(方)이며 용(用)은 원(圓)이다.
모양 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體)이다. 지금의 역(易)은 서로 체(體)이면서 용(用)이니, 스스로 원(圓)이면서 원(圓)하고, 스스로 방(方)이면서 방(方), 스스로 각(角)이면서 각(角)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命)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圓)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허무의 공(空)일 뿐이니 어찌 체(體)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體)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體)로 한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 있는 것은 곧 모두 수(數)를 가진다. 수(數)가 있으면 곧 모두 힘을 가진다. 이미 수(數)가 있다고 말함은 곧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有形)과 무형(無形)의 구별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사물은 말(言)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言)이 없으면 곧 없는 것이다.
3.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허공(36자)
帝曰爾五加衆아 蒼蒼이 非天이며 玄玄이 非天이라 天은 無形質하며 無端倪하며
제왈이오가중 창창 비천 현현 비천 천 무형질 무단예
無上下四方하고 虛虛空空하야 無不在하며 無不容이니라.
무상하사방 허허공공 무부재 무불용
제 가로되,「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라고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形)과 바탕(質)이 없으며 첫끝(端)과 맞끝(倪)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하며 속은 텅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51자)
神은 在無上一位하사 有大德大慧大力하사
신 재무상일위 유대덕대혜대력
生天하시며 主無數世界하시고 造兟兟物하시니
생천 주무수세계 조신신물
纖塵無漏하며 昭昭靈靈하야 不敢名量이라
섬진무루 소소영영 불감명량
聲氣願禱하면 絶親見이니 自性求子하라 降在爾腦시니라.
성기원도 절친견 자성구자 강재이뇌
신은 위 없는 첫 자리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없는 세계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티끌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천궁(40자)
天은 神國이라 有天宮하야 階萬善하며 門萬德하니 一神攸居오
천 신국 유천궁 계만선 문만덕 일신유거
群靈諸哲이 護侍하니 大吉祥大光明處라. 惟性通功完자라야 朝하야 永得快樂이리라.
군령제철 호시 대길상대광명처 . 유성통공완 조 영득쾌락
천은 신국이라, 천궁(天宮)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일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군령(群靈)과 선관((諸哲)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세계(72자)
爾觀森列星辰하라 數無盡하고 大小明暗苦樂이 不同하니라.
이관삼열성신 수무진 대소명암고락 부동
一神이 造群世界하시고 神이 勅日世界使者하사 轄七百世界하시니 爾地自大나 一丸世界니라.
일신 조군세계 신 칙일세계사자 할칠백세계 이지자대 일환세계
中火震盪하야 海幻陸遷하야 乃成見象하니라.
중화진탕 해환육천 내성현상.
神이 呵氣包底하시고 煦日色熱하시니 行翥化游裁物이 繁殖하니라.
신 가기포저 후일색열 행저화유재물 번식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않으니라. 일신께서 뭇 세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日世界)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 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일신께서 김(氣)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을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167자)
人物이 同受三眞하니 曰性命精이라 人은 全之하고 物은 偏之니라.
인물 동수삼진 왈성명정 인 전지 물 편지
眞性은 無善惡하니 上哲이 通하고 眞命은 無淸濁하니 中哲이 知하고
진성 무선악 상철 통 진명 무청탁 중철 지
眞精은 無厚薄하니 下哲이 保하나니 返眞하야 一神이니라.
진정 무후박 하철 보 반진 일신
惟衆은 迷地에 三妄이 着根하니 曰心氣身이라 心은 依性하야 有善惡하니 善福惡禍하고
유중 미지 삼망 착근 왈심기신 심 의성 유선악 선복악화
氣는 依命하야 有淸濁하니 淸壽濁妖하고 身은 依精하야 有厚薄하니 厚貴薄賤이니라.
기 의명 유청탁 청수탁요 신 의정 유후박 후귀박천.
眞妄이 對作三途하니 曰感息觸이라 轉成十八境하니 感엔 喜懼哀怒貪厭이오
진망 대작삼도 왈감식촉 전성십팔경 감 희구애노탐염
息엔 芬蘭寒熱震濕이오 觸엔 聲色臭味淫抵니라.
식 분란한열진습 촉 성색취미음저
衆은 善惡淸濁厚薄을 相雜하야 從境途任走하야 墮生長消病歿의 苦하고
중 선악청탁후박 상잡 종경도임주 타생장소병몰 고
哲은 止感하며 調息하며 禁觸하야 一意化行하야 返妄卽眞하야 發大神機하나니 性通功完이시니라.
철 지감 조식 금촉 일의화행 반망즉진 발대신기 성통공완
4. 신지비사(神誌秘詞)
《신지비사(神誌秘詞)》는 단군 달문(達門) 때의 사람 신지(神誌) 발리(發理)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 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제천(上古祭天)의 참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으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신지비사(神誌秘詞)》를 가지고 도참(圖讖) 성점(星占)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數)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진단구변도(震檀九變圖)》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口訣)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저울대는 부소량(扶蘇樑)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한의 옛 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 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松花江)의 하르빈이다. 또「저울의 추는 오덕지(五德地)라 함은 번한의 옛 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開平府)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湯池堡)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저울 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지금의 대동강(大洞江)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熊伯多)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 가지 형석(衡石)에 비유해 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여 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함께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여 복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이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5. 각종의 서체
「신시에는 녹서(鹿書)가 있고 자부(紫府)에겐 우서(雨書)가 있고 치우(蚩尤)에게는 화서(花書)가 있어, 투전문(鬪佃文)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伏羲)에겐 용서(龍書)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흑수․청구․구려에 쓰여졌다」고 했다.
6. 구서지문(九誓之文)
어느 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고 다스림을 크게 바꾸고자 하여, 천제묘의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달도록 하였다. 3․7일을 기한으로 연령순으로 서로 술을 마시면서 서로 권하여 덕화를 이루자는 내용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 모임을 구서지회(九誓之會)라 하였고, 그 때 서로 맹세한 내용을 ‘구서지문(九誓之文)’이라 하였습니다.
7. 참전계경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찍이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天書)를 얻으니 이를《참전계경》이라 했다.「대시(大始)에 철인(哲人)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 사(事)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條)가 있나니 성(誠)․신(信)․애(愛)․제(濟)․화(禍)․복(福)․보(報)․응(應)이라 한다. 성(誠)은 충심(衷心)이 발하는 것으로서 진실(眞實)에서 나오는 정성(精誠)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體) 47용(用)이 있고, 신(信)은 천리의 필합(天理之必合)으로서 인사의 필성(人事之必成)이라, 5단(團) 35부(部)가 있다. 애(愛)는 자심의 자연(慈心之自然)으로 인성의 본질(仁性之本)이다. 6범(梵) 43위(圍)가 있다.
제(濟)는 덕의 겸선(德之兼善)으로서 도가 잘 미치는 것(道之賴及有)이라, 4규(規) 32모(模)가 있다. 화(禍)는 악이 부르는 것(惡之所召有)이다. 6조(條) 42목(目)이 있다. 복(福)은 선의 여경(善之餘慶有)이다. 6문(門) 45호(戶)가 있다. 보(報)는 천신(天神)이 하는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惡人以禍報) 선인에 보하는 데 있어서는 복으로 한다(善人以福有).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應)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惡受惡報)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善受善報有). 6과(果)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陟降)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戒)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經)을 삼고 5사를 위(緯)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弘益濟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佺戒)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보냐?」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